2017년 12월 6일 수요일

첫 논문의 추억과 연구 시작하기 (2015년 강북삼성병원 특강을 돌아보며)

저는 논문을 많이 쓰는 교수가 아닙니다. 요즘은 2년에 하나가 목표입니다.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습니다. PubMed에서 '이준행'과 '성균관'을 keyword로 입력하였더니 95개가 검색되었습니다 (종설, 증례, editorial 포함). 제가 제 1 저자인 문헌이 11개, 교신 저자인 문헌이 17개였습니다. 사실 제가 썼지만 제1 저자도 아니고 교신저자도 아닌 논문이 4개 있었습니다 (11907356119207811263001617905010). 그 중 2개는 제가 자료를 받은 것이고, 2개는 아이디어를 받아 자료를 모은 것입니다. 억울하지는 않습니다. 아이디어가 중요한 연구는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제1 저자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견습 단계의 젊은 의사는 제 2 저자로 논문을 내는 것이 당시의 관행이었습니다.

과거의 관행이 꼭 나쁜 것은 아닙니다. 나름 좋은 점도 있었습니다. 견습기간 동안 배울 기회가 있었습니다. 제1 저자나 교신저자는 아니더라도 선배들의 충실한 지도를 받으며 논문 쓰는 법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출판윤리를 강조하는 최근의 경향이 꼭 좋은 것은 아닙니다. 민주적인 기회 제공이 오히려 기회를 빼앗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말입니다.

논문을 쓴 사람이 제1 저자가 되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그러나 한번도 논문을 써보지 못한 사람이 갑자기 제1 저자로 연구를 주도하여 논문을 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모든 과정을 소화하지 못하면 단 하나의 논문도 못 쓰게 됩니다. 눈썰미가 좋고 감을 빨리 잡는 사람은 자기 논문을 쓸 수 있지만, 조금 천천히 배우는 사람은 자기 논문을 갖지 못하는 것이 요즘 방식입니다. 토끼는 살고 거북이는 죽은 방식입니다. 조금 느리지만 꼼꼼하고 신중한 거북이는 모두 사라지고 있습니다. 세상은 점점 가벼워지고 있습니다. 참기 어려울 정도로...

제2 저자로서 논문을 쓰면서 스스로 '자기 논문 만드는 법'을 배우는 방식 - 저의 방식이었습니다 - 은 더 이상 불가능합니다. 만약 그런 일을 시켰다가는 악덕 교수로 신문에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세상이 이러하니, 연구하는 법 혹은 논문쓰는 법에 대한 강의 요청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도제방식으로 견습 단계를 거치면서 조금씩 익혀야 하는 기술을 강의로 대신해 달라는 것입니다. 강의의 결과는 항상 '실패'입니다. 논문쓰는 법을 어떻게 강의한다는 말입니까. 라디오를 듣고 발레를 배우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도 강의는 계속됩니다. 제2 저자로 논문쓰는 법을 연습해보라고 시킬 수는 없으니까요. 출판윤리는 지켜야 하니까요.

저는 출판된 SCI 논문 하나 없었는데도 조교수 발령을 받았습니다. 일단 발령을 주고 seed money 혹은 'seed 기회'를 제공한 후 성과를 평가하는 것이 과거의 방식이었습니다. 요즘은 SCI 논문이 여러개 있어야 대학병원에서 일자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견습이고 뭐고 없습니다. 1년차 신인도 홈런을 쳐야 합니다. 참 어려워졌습니다.

여하튼 '논문쓰는 법' 강의를 의뢰받았습니다. 실패는 자명한 결과입니다. '논문쓰는 법'에 대한 책은 많기 때문에, 내용을 조금 바꿔 '연구하는 법'을 강의하려 합니다. 저의 경험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볼까 합니다. 운이 좋았던 저의 첫 경험을 소개하면서... 요점은 이것입니다. "Something New에 집착하지 말자. Me Too 논문을 쓰자. "So what?"을 무시하자."

진짜 훌륭한 논문은 교수가 된 이후라도 늦지 않습니다. 일단 쓰십시요. 처음부터 훌륭한 논문을 목표하면 하나도 못쓰게 됩니다. 일단 시작하십시오. 처음에는 서둘러야 합니다. 엉성하더라도 논문 3개를 써 보십시오. 그 이후로는 저절로 됩니다. 처음이 어렵습니다. 하면 됩니다.


 [2015-9-15. 강북삼성병원 Medical Writing Academy]

강북삼성병원 Medical Writing Academy 9월 교육에 다녀왔습니다. 강북삼성병원은 제게 고향같은 곳입니다. Fellow를 마치고 처음 일하던 곳이니까, 말하자면 저의 첫 직장인 셈입니다. 1시간 가량 일찍 도착해서 이곳 저곳을 둘러보았습니다.

강북삼성병원의 한 가운데에는 '京橋莊(경교장)'이 있습니다. 사적 제465호 '경교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공간이자, 백범 김구 선생이 서거한 역사의 현장입니다. 원래 친일파 거부 최창학이 1938년 건립하였습니다. 194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환국하자 경교장은 임시정부의 활동공간 및 김구 주석와 임정요인들의 임시 숙소로 사용되었습니다. 이후 중화민국 대사관저, 월남대사관 등으로 사용되다 1967년부터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이 되었습니다. 제가 근무하던 당시에도 병원 원무과로 이용되고 있었는데 이번에 가 보았더니 완전히 문화재로 복원되어 있었습니다. 2005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2010년 복원사업이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아래 사진은 임시정부의 국무회의 등 대표적인 회의들이 개최되고, 김구 선생님이 국내외 주요 인사들을 접견하던 응접실입니다.

* 참고: http://www.dapsa.kr/blog/?p=9113


제 강의 제목은 첫 논문의 추억과 연구 시작하기였습니다. 논문과 강의를 위한 그래픽 이미지 관리를 포함하여 1시간 강의를 하였습니다.

그래픽 이미지 파일 관리 측면에서 저널 투고규정을 어떻게 바꾸는 것이 좋을지 질문이 있었습니다. 일전에 비슷한 질문을 받고 한 학회지 투고규정을 개선안을 낸 바 있어 소개합니다.

기존의 투고규정에는 'Powerpoint나 JPG 형식이어야 한다'거나 '30MB 이내이고 600dpi 이상이어야 한다'는 등 최선의 그래픽 이미지 파일 관리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내용이 있었습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개선안을 제안하였습니다. Line art (graph나 illustration)가 처음부터 Powerpoint에서 만들어졌다면 Powerpoint 자체를 받아도 좋습니다. 그러나 실제 논문을 쓰는 분들이 저해상도 photographic image를 이용한 질낮은 Powerpoint를 학회지에 제출하는 사례가 많습니다. 따라서 투고규정 개선안에는 Powerpoint에 대한 부분을 아예 언급하지 않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제 강의에 이어 대한내분비학회 EnM 편집위원장 이원영 교수님 (강북삼성병원 내분비 내과)의 "편집자 및 심사자와 소통하기"라는 제목의 강의가 있었습니다. 일부 내용입니다.

- 내분비학회 영문 저널 EnM가 최근 Scopus에 등재가 되었다고 합니다. Scopus에 등재되면 국제학술지로 부를 수 있습니다. PubMED에 등재되었다고 국제학술지로 부를 수는 없다고 합니다.

- Revision에 대하여 답장쓸 때 중요한 것은 Be polite라고 합니다. 또한 Detailed rationale를 제공해야 합니다.

- Reject and reinvite로 답이 오면 70-80%는 결국 accept 됩니다. 포기하지 맙시다.

- Revision 과정 중 내용은 훨씬 나아지기 때문에 감사의 마음으로 원고를 고쳐나가야 할 것입니다.

- Reject 되는 이유 중 하나는 "Huge amount of editorial work is required"입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글도 규정에 맞게 잘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저널 많이 읽기, 연구 트랜드 파악하기가 중요합니다.

그렇습니다. 남의 논문을 읽지 않고 좋은 논문을 쓸 수 없습니다.


 [FAQ]

[2015-8-25. 애독자 편지]

안녕하세요 교수님. 운동학회 Young leader's academy에서 교수님의 presentation하는 법을 들은 후 EndoTODAY를 애독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교수님께서 보내주신 논문쓰는 법/연구하는 법을 읽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다음 두 슬라이드가 와닿았습니다.

연구를 하는 목적은 각자 다르겠지만, 저와 같은 임상/주니어 스태프 입장에서는 승진이나 career를 쌓는 데 필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연구 주제에 관해 선배 교수님들과 논의하다 보면 "이미 나온 결과인데", "뚜렷한 목적이 없자나", "그건 점수 높은데 못 낼 것 같은데" 등의 말을 듣고, 위축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또한, 강행했다가 negative 결과가 나오면 더 낙심했습니다.

그런데 이미 쓴 논문 중에서 제가 애착을 가진 논문을 보면 목표치 미달성 혹은 아직 갈 곳을 못 찾고 세계를 떠도는 논문일지라도, 제가 궁금한 부분에 대해 연구 주제를 선정하고 직접 데이터를 조사하고 정리해서 만든 연구들이었습니다. 교수님 말씀처럼, 연구를 위한 연구가 되지 않고 진급/SCI라는 사심이 들어가는 것 같아 아쉽지만 제가 생각한 부분을 연구할 때 가장 행복했다라는 진리를 깨닫고, 다시 열심히 정진하려 합니다. 간접적으로나마 격려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좋은 후학이 되어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2015-8-28. 이준행 답변]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승진이나 career 평가에서 SCI 논문 비중이 너무 높습니다. 논문 중심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말라고 아무리 외쳐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SCI 논문을 과대평가하는 현재의 시스템은 상당기간 계속될 것 같습니다. 어쩔수 없습니다. 그냥 주어진 환경입니다. 제법 오래갈 것 같습니다. 너무 가혹할지 모르겠으나... 젊은 교수 혹은 교수 지망생이라면 SCI 논문을 매년 하나 혹은 그 이상 꾸준히 생산하기 바랍니다 (제가 '생산'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이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지 않고는 career 관리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SCI 출판이 목표가 아닌 그냥 좋은 연구, 나만의 연구도 함께 시도하라는 것입니다. 궁금한 것을 연구하면 됩니다. 어떤 궁금증은 답을 찾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논문화 시키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래도 꾸준히 노력하면 보람을 느낄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배우는 것도 많습니다.

사실 저는 진료와 교육에 뜻을 두고 있습니다. '진료 5, 교육 3, 행정 1, 연구 1' 정도의 비중입니다. 의외라구요? 저는 진료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환자가 편하게 진료받을 수 있도록 진료 전 준비와 진료 후 관리를 잘 하는 일, 잘 설명하고 자세히 기록을 남기는 일, 과잉 검사나 과잉 치료를 피하면서 꼭 필요한 의료 서비스를 적시에 제공하는 것 등 진료의 비중이 매우 높습니다. 외래 전 1시간 준비, 외래 후 1시간 정리는 보통입니다. 따라서 제 외래는 한번이 5시간입니다. 그러나 환자를 위해서 사전 준비와 사후 관리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ndoTODAY 자료를 만드는 것, 강의 자료 준비, staff lecture, 병원 내부 집담회 등은 교육활동입니다. 행정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병원 quality officer 시절에는 이 비중이 30% 정도였는데 내시경실장이 되고 난 후에는 10% 정도입니다. 남는 시간 10%가 연구인 셈인데 상당히 부족합니다. 그러나 그럭 저럭 끌고 갈 수 있습니다. 교수가 된 이후로는 2-3년에 논문 하나면 만족하려고 합니다.

제 삶이 여러분의 모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저는 운이 좋은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도 한 때는 교수지망생이었습니다. 젊은 조교수였습니다. SCI를 생산하지 못하여 고민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금씩 나이를 먹으면서 삶의 중심이 바뀌는 것 같습니다.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두서없는 이야기가 되고 말았습니다만, 마지막 부탁이 있습니다. 연구만 중요하고 다른 모든 것은 가볍게 보는 가분수형 인간은 되지 마십시오. 환자를 material로 보는 의사, 학생을 짐으로 생각하는 교수는 되지 마십시오. 균형된 지식인으로 성장하기 바랍니다.

언제 전화 한번 주십시오. 제가 술 한잔 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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